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[[워런 G. 하딩|워런 하딩]] 미국 대통령이 개최한 워싱턴 해군 회의에서는 해군 군축문제외에도 [[중국]]문제와 [[영일동맹]] 문제도 같이 다루어졌다. 중국문제를 다룬 회의에서는 일본이 중국정부에게 강요한 [[21개조 요구]]를 취소시키고 [[베르사유 조약]]에서 인정된 [[산둥성]]의 독일 이권들을 중국에게 넘기도록 하는 한편, 공평한 문호개방을 내세워서 중국의 현유영토의 유지와 균등한 중국 내 상업기회 보장 등을 요구하는 9개국 조약[* 9국 공약, 9국 조약으로도 불린다.]을 성립시켰다. 중국은 [[스자오지]]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산동반도 문제, 조계지 문제, 관세자주권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때 [[중화민국]] 대표로 참석한 [[구웨이쥔]]은 불리한 정세 아래에서도 중국의 국익을 되찾아왔다면서 "민국외교영웅" 등으로 불리며, [[군벌]] 간 [[내전]]에서 총리 후보로 단골 추대되는 등 여러 정파의 추대를 받았다. 훗날 중화민국 외교부장에 임명되는 [[뤄원간]]은 이때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했다. [[영일동맹]]은 이미 [[제정 러시아]]와 [[독일 제국]]이 대전이 끝나면서 사라지면서 그 효력이 의심받게 되었지만, 미국과 밀착관계에 있던 [[신대륙]]과 [[오세아니아]]의 [[영연방]] 국가-[[캐나다]], [[오스트레일리아]], [[뉴질랜드]] 등이 "영일동맹이 지속될 경우 미일간의 전쟁에서 자치령의 이익보호를 위해 종주국인 영국과 전쟁(!)을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!"는 협박(?) 및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독주를 영국이 묵인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 등이 겹치게 되었다. 실제로 이 당시 미국은 서류상의 계획이긴 하지만 [[색부호 전쟁 계획|'레드 계획']]이라 하여 캐나다 등지에서 영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작전 시나리오를 구상하기도 했다. 따라서 워싱턴 조약에선 일본의 폭주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영일동맹을 해소하고 이를 대체하는 조약으로서 중국 지역에 다대한 이권을 가진 미국/영국/일본/프랑스 4개국이 이권보장을 추구한다는 4개국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. 즉 '''[[워싱턴 D.C.]]에서 개최된 모든 종류의 회의에서 일본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추구를 제한당하게 된 셈이다.''' 사실, '''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팽창양상은 같은 [[제국주의]] 국가들인 미국과 서유럽 [[제국]]들조차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'''이어서 일본의 팽창욕을 제한하려는 의식이 서양국가들에게 있었다.[*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끝난 후 열강이 [[러시아 내전]]에 개입할 당시에도 일본이 열강들 중 가장 많은 병력을 [[시베리아]]에 파병하여 여차하면 시베리아를 병탄하려고 시도하였고 또 가장 늦게 철군하였다. 서구에서 전간기라 부르는 시기 일본은 내내 전쟁하며 점령지를 늘리고 있었으니 이해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.] 물론 이 사건이 오히려 일본의 팽창욕을 자극해서 20년 뒤 [[태평양 전쟁]]으로 이어지고 말긴 하지만.. 그리고 받아먹기만한 감은 있지만 [[워런 G. 하딩|워런 하딩]]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. 행정학자인 파킨슨은 1914년부터 1928년까지 영국 해군의 함선 수와 장병 수가 모두 감소했음에도 행정인력은 오히려 증가했음을 발견하고, 이를 토대로 공무원 수는 업무량과 관계 없이 증가한다는 [[파킨슨의 법칙]]을 제시한다. 파킨슨의 법칙은 관료제에 대한 유명한 설명 중 하나이지만, 하필 예시로 든 영국 해군이 이 군축조약의 거대한 영향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사례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.[* 까놓고 말해 군축조약이 나가리가 될 때를 대비해서 예비 인원들을 대기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. 군함이 줄어든다고 사람까지 줄였다가 나중에 누군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때까지 있다가 조약으로 사라진 숙련병들을 어디서 다시 찾는다는 말인가?][* 실제로 영국 해군은 군축 조약으로 인한 규모 감소 문제를 장병들의 숙련도와 예비대로 극복하고자 했고, 이런 노력 덕에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사격 통제 장치 등 주포와 장갑이 아닌 소프트 스펙 면에서는 타국 대비 상당한 우위를 점했다. 2차 대전 발발 후에도 전쟁 전부터 관리하던 예비대 조직 덕에, 막대한 함선과 승조원의 손실 및 전쟁 중 해군 규모가 오히려 커지는데도 승조원 기량 문제를 비교적 크게 겪지 않았다. 비슷한 시기 미 해군이 물론 팽창 규모가 너무 컸던 탓도 있지만 예비대 조직의 부족으로 인해 승조원 기량 문제를 겪던 것과 비교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